두테르테 필리핀 전 대통령/사진=구글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을 명분으로 반인도적 살상을 저지른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수감됐다. 현지시간 12일, 두테르테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ICC 구금 센터로 이송돼 본격적인 재판 절차를 앞두게 됐다.
AP 통신과 현지 매체 마닐라타임스 등에 따르면, 두테르테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출발해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를 경유한 뒤 이날 헤이그 공항에 도착했다. 여객기가 헤이그에 착륙하기 직전,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영상 메시지를 통해 “경찰과 군대가 각자 할 일을 하면, 그 책임은 내가 지겠다고 약속했다”며 모든 책임을 자처했다.
그는 “나는 국가를 위해 일했으며, 국민을 보호하고 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강조했다. 또한, 긴 법적 싸움이 예상되지만 “계속해서 국가를 위해 봉사하겠다”며 “이것이 내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덧붙였다.
ICC는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2011년 11월부터 2019년 3월까지 다바오 시장 시절과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마약 관련 용의자를 표적으로 삼아 대규모 살상을 지시하거나 묵인한 혐의로 기소했다. 필리핀 정부 공식 집계에 따르면, 그의 ‘마약과의 전쟁’ 과정에서 약 6천20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국제 인권단체들은 실제 사망자 수가 3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며, 대부분이 비무장 민간인이라고 주장해왔다.
두테르테는 대통령 재임 당시 마약 복용자나 판매자가 즉각 투항하지 않을 경우 경찰이 총격을 가하도록 사실상 허용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는 국제사회로부터 반인도적 범죄라는 비난을 받았다.
카림 칸 ICC 검사장은 두테르테의 체포 영장이 집행된 사실이 “피해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는 국제법이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약하지 않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한편, 볼커 튀르크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이번 체포가 “수천 명의 살인 희생자들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중요한 단계”라고 평가했다.
두테르테는 현재 ICC 구금 센터 내 약 10㎡ 크기의 방에서 수감 생활을 시작했다. ICC는 그의 건강 상태를 확인한 뒤 며칠 내로 예비 심문 기일을 잡을 예정이다. 본격적인 재판은 몇 달 후 시작될 전망이다. 두테르테의 기소는 2019년 무죄 선고를 받은 로랑 그바그보 전 코트디부아르 대통령 이후 전직 국가 수반으로는 두 번째 사례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ICC 체포는 국제법 적용의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미국의 제재 대상이 된 ICC 검사장 카림 칸이 주도한 이번 조치는 국제사회의 범죄 처벌 의지를 다시 한번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번 재판은 두테르테의 책임 여부를 가리는 것을 넘어, 세계적으로 논란이 된 ‘마약과의 전쟁’ 정책의 윤리적·법적 문제를 재조명하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