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봉 마르코스 주니어(왼쪽), 사라 두테르테(오른쪽)/사진=AI“나를 헤이그로 데려가려면 차라리 죽여라.”
2025년 3월,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체포되던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은 이렇게 외쳤다. 79세 노정객이 공항에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넘겨지는 그 장면은 필리핀 정치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 체포극은 단순한 법 집행이 아니다. 이는 봉봉 마르코스 현 대통령과 두테르테 가문 간의 권력 전쟁이자, 필리핀 정치가 본질적으로 ‘가문 대 가문’의 피 튀기는 게임임을 다시금 증명한 사건이다.
마약과의 전쟁, 그리고 체포까지
로드리고 두테르테는 2016년부터 2022년까지 필리핀을 이끈 대통령이다. 그가 내건 대표 공약은 ‘마약과의 전쟁’이었다. 투항하지 않는 마약 용의자는 현장에서 사살하라는 그의 지시는 국내외에서 ‘사법살인’ 논란을 불렀다.
공식 발표된 사망자는 6천여 명. 인권단체들은 실제 희생자가 3만 명을 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국제형사재판소(ICC)는 반인륜범죄 혐의로 수사에 착수했고, 결국 ICC가 발부한 체포영장을 필리핀 정부가 집행하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다. 문제는 체포 주체가 바로 현직 필리핀 정부였다는 점이다. 전직 대통령을 자국 정부가 직접 체포해 국제법정에 넘겼다는 사실은 단순한 법 집행 이상의 정치적 맥락을 내포하고 있다.
마르코스 vs 두테르테, 북부와 남부의 전쟁
필리핀 정치의 특수성은 철저한 ‘가문 정치’에 있다. 대통령을 배출한 주요 가문만 해도 마르코스, 아키노, 아로요, 오스메냐, 그리고 두테르테 가문이 있다. 이들 가문은 각자의 지역 기반을 바탕으로 수십 년간 대를 이어 권력을 이어왔다.
그중 마르코스 가문은 필리핀 북부를, 두테르테 가문은 남부 민다나오 지역을 기반으로 한다. 2022년 대선에서 두 가문은 손을 잡았다. 마르코스의 아들 ‘봉봉’이 대통령, 두테르테의 딸 사라가 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북부와 남부의 연합이자, 두 왕조의 동맹이었다. 그러나 권력은 나눌 수 없었다.
대선 당시 사라는 봉봉에게 “부통령과 국방부 장관을 겸직하겠다”고 약속받았다. 하지만 봉봉은 약속을 깨고 그에게 교육부 장관직을 맡겼다. 이후 두 가문 간의 균열은 격해졌고, 사라는 공개석상에서 “우리는 더 이상 아군이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이후 사라와 봉봉은 상호 비방전을 주고받으며 ‘정부 내 내전’ 수준의 갈등을 드러냈다.
“몸과 머리를 분리하겠다”... 필리핀판 정치 패륜극
갈등은 정치적 격돌을 넘어섰다. 사라 부통령은 봉봉 대통령을 향해 “필리핀을 지옥으로 이끌고 있다”며 독설을 퍼부었고, 마르코스 가문에 대한 조롱을 넘어 “그의 아버지 유해를 파내 바다에 버릴 것”이라는 극단적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암살당할 경우 대통령과 그의 가족을 죽이도록 암살조와 이미 계약을 맺었다”는 폭탄 발언도 터졌다. 필리핀 정부는 즉시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중대한 발언”이라며 사라를 탄핵하겠다고 맞섰고, 2025년 2월 하원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됐다.
체포는 선거를 위한 정치적 카드인가
이런 상황 속에서 전 대통령 두테르테는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계 복귀를 선언하며 다시 다바오 시장 출마를 공식화했다. 동시에 필리핀 상원의 12석이 걸린 중간선거도 예정돼 있다. 사라 탄핵의 향방, 두테르테 가문의 정치적 생존은 이번 선거에 달렸다. 이 와중에 벌어진 두테르테 체포는 ‘법적 정의’로만 보기엔 타이밍이 너무도 절묘하다.
게다가 ICC는 자력으로 체포를 집행할 수 없는 국제기구다. 실제 집행은 ‘해당 국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필리핀 정부가 ICC의 요청을 수용해 두테르테를 넘긴 행위는 그 자체로 정치적 의도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ICC는 누구를 잡아가고, 누구를 못 잡는가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반인륜범죄, 전쟁범죄 등을 다루지만, 실효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ICC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에게도 체포영장을 발부했지만 현실적으로 이들을 체포하지 못하고 있다.
푸틴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 후 러시아는 “헤이그에 핵을 쏘겠다”는 위협을 날렸고, 미국은 네타냐후 기소에 반발하며 “ICC를 제재하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ICC가 실질적으로 체포할 수 있는 대상은 ‘국가 내부 권력으로부터 버림받은 인물’뿐이다. 두테르테가 딱 그 경우다.
필리핀 정치, 어디로 가는가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체포는 단순한 인권 범죄에 대한 단죄가 아니다. 그것은 필리핀이라는 나라가 여전히 가문 중심의 정치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정치적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법과 국제기구마저 도구화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선거 결과에 따라 두테르테 가문이 다시 반격에 나설 수도, 완전히 몰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필리핀 정치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게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