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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영국 BBC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다. 매년 웨일스 브리스톨 해협에서 잡히는 약 1만 톤의 골뱅이 중 상당수가 먼 아시아, 특히 한국으로 수출된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실제로 전 세계 골뱅이 소비량 중 약 80% 이상이 한국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골뱅이는 한국인의 식문화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골뱅이 무침, 골뱅이 소면, 골뱅이 통조림 등 다양한 형태로 소비되는 이 해산물은 최근 가격 상승과 자원 고갈로 인해 점차 '귀한 미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골뱅이는 단순한 안주가 아니다. 나선형 껍데기를 가진 바다 고둥을 통칭하는 이름으로, 선사시대 신석기 유적에서도 고둥 껍데기가 발견될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다. 조선 후기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골뱅이를 ‘라(螺)’라 명명하며 삶거나 구워 먹는 법을 소개한 바 있다.
현대 한국에서 골뱅이의 전국적 인기를 이끈 것은 바로 통조림 기술의 도입이었다. 1960년대 후반, 일본 수출용으로 만들어졌던 골뱅이 통조림이 일부 국내에 유통되면서 일반 소비자들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서울 을지로의 인쇄소 골목에서 '골뱅이 무침'이라는 간단하면서도 중독적인 안주가 탄생했다. 이 매콤새콤한 요리는 빠르게 입소문을 타며 전국적인 인기를 얻었다.
한때 동해안에서 연간 수천 톤이 잡히던 물레고둥(한국 골뱅이)은 1990년대 후반 들어 자원 고갈로 생산량이 급감했다. 국내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해외 수입으로 눈을 돌렸지만, 중국산은 식감이 부드러워 외면받았고, 캐나다산은 가격이 높아 대중화에 실패했다.
결국 선택된 건 영국과 아일랜드, 노르웨이 해역의 대서양 골뱅이였다. 이 골뱅이는 쫄깃한 식감과 안정적인 수급이 가능해 현재 국내 골뱅이 통조림의 약 90%를 차지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환경 보호를 위한 국제 조업 규제 강화로 골뱅이의 공급 역시 다시 줄어들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영국 정부는 연안 생태계 보호 차원에서 골뱅이 어획량 제한을 검토 중이다.
골뱅이의 현재 상황은 과거 ‘캐비어’나 ‘우나기(민물장어)’의 전례를 떠올리게 한다. 한때 흔한 서민 음식이었던 이들 식재료는 남획과 공급 감소로 인해 오늘날 고급 미식으로 재탄생했다.
골뱅이 역시 같은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골뱅이 가격은 꾸준히 상승 중이며, 통조림 제품 중에서도 ‘고형량’이나 ‘원료 등급’ 등 품질 기준이 강조되는 프리미엄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골뱅이를 보다 특별하게 즐기려는 시도도 다양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통조림 골뱅이를 활용해 이탈리아식 파스타 ‘콘킬리오니(조개 모양의 대형 파스타)’ 속을 채우는 요리법이 주목받고 있다.
올리브오일에 볶은 골뱅이를 리코타와 파르미지아노 치즈와 섞어 속재료를 만든 뒤 토마토 마리나라 소스와 함께 오븐에 구워내면, 바다의 풍미와 유럽식 요리가 결합된 이색 별미로 재탄생한다.
익숙했던 골뱅이가 점점 더 귀한 존재가 되어가는 요즘,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식문화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언젠가 골뱅이가 캐비어나 우나기처럼 ‘그 시절엔 쉽게 먹던 음식’으로 회상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 골뱅이 한 접시를 앞에 두고 있는 우리는 그 마지막 세대일 수도 있다.